안장자 교육학박사 칼럼

안장자 교육학박사.
안장자 교육학박사.

아직은 찬 바람이 매서운 금요일, ‘맛있는 겨울’이라는 주제로 아이들과 끝없는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야외 교육활동의 일환으로 가까운 농원에서 고구마와 마시멜로를 구워 먹기로 한다.

농원에 도착한 아이들은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돌고래 괴성을 지른다. 무한히 계속될 듯 질주하며 몇 바퀴를 돌고 나더니 모두 숯불구이 판으로 몰려들어, 꼬치에 끼워진 마시멜로를 굽기 시작했다. 약한 숯불 위에 손수 요리조리 돌려보면서 스스로 구워 먹는 마시멜로에 취한 아이들의 표정은 세상을 다 가진 듯하다. 아차 방심하는 순간 마시멜로는 흐물흐물 못난이 모양으로 녹아버려서, 아이들은 최대한 동그랗고 예쁘게 부푼 마시멜로를 자랑하기 위해 열심이다. 표정은 사뭇 경건하기까지 하다. 

아이들이 집중한 탓에 농원에 내려앉은 적막함도 잠시, 제 몫의 마시멜로를 다 먹은 아이들의 축제 한 판이 벌어진다. 신난 아이들은 마법의 지팡이가 된 마시멜로 꼬치로 허공을 가르기도 하고, 굴착기가 된 꼬치로 농원 주변 땅을 후벼 파기도 한다. 거대한 붓이 된 꼬치로 한 켠에 남은 겨울 눈 위에 그림을 그리기도 하는데, 바닥에 그린 원은 술래잡기 놀이에서 뭔가 중요한 역할을 하는 모양이다.

특급 개구쟁이로 꼽히는 한 아이는 군고구마를 담았던 플라스틱 간식 접시를 꼬치에 살짝 꽂아 돌리면서 잠시 중국 곡예사가 된다. 한 구석에선 한 아이가 꼬치를 현란하게 움직이며 “이리 와, 이리 와”하고 가까이 올 리 없는 새끼 강아지와 고양이를 유혹하고 있다. “요걸로 뭘 하고 놀까...” 열심히 고민하다가 놀이를 창조해 내는 우리 아이들이 정말 귀엽고 기특하다. 

사실, 우리가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50센치 나무 꼬치가 ‘어떻게든 변형하여 놀 수 있는, 상상력을 자극하는 아주 재미난 놀잇감’이란 것과 동시에, 아이들의 안전을 위협하는 대단히 위험한 도구가 될 수 있다는 것은 유아교육기관을 운영하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안다. 농원으로 야외 활동을 떠나기 3일 전부터 나무 꼬치를 어떻게 하면 안전하게 만들면서 아이들에게 멋진 추억을 줄 수 있을지, 밤늦도록 고민하고 온갖 방법을 동원했던 기억이 난다. 

처음엔 커터 칼이나 가위로 잘라 보려고 용을 썼지만, 잘 잘리지 않았다. 좌절할 즈음 교무실 한 구석에 있는 복사지 전용 절단기가 눈에 들어왔다. 미니 작두처럼 생긴 절단기를 앞에 두고 철푸덕 앉아 작업을 시작했는데, 나무 꼬치의 끝부분만 미세하게 잘라 내려니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끙끙대다가 “야호!”, 그러나 성공의 기쁨도 잠시, 잘려 나간 촉 주변을 만지는 순간 가시가 손에 박힐 것 같은 걱정이 들었다.

수북히 쌓인 꼬치를 옆에 두고 망연자실해 있는 나에게 선생님이 살포시 사포를 가져다 주신다. 쓱쓱 갈아 보니 제법 매끈해졌다. 몇 시간 동안 자르고, 갈고, 하나, 둘 완성되니 선생님들이 격려 반, 장난 반으로 “잘한다, 잘한다”하며 응원하며 지나간다. 어휴, 이 힘든 걸 애초에 왜 시작했담.

단기간의 초고속 경제 성장 탓인지 아이들의 장난감이나 교구 역시 급속도로 발전하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유치원에도 세련된 교구가 넘쳐난다. 대표적으로 손만 대면 착착 붙고, 한 번 쌓으면 웬만해선 무너지지 않는 자석 교구가 있는데, 아이들도 아주 좋아한다. 다만, 평범한 나무 블럭으로 탑을 쌓았던 우리네 시대와 달리, 아이들이 자석 교구로 만든 빌딩은 여간해서는 무너지지 않는다. 아이들은 이제 시행착오와 그것을 딛고 다시 시도하는 경험의 소중함을 알기 어렵게 되었다. 자석 교구로 빌딩을 한 번에 쌓아 올린 아이들은 금세 어느 별의 외계인이 되어 스스로 빌딩을 무너뜨린다. 쉽게 얻은 성취감의 이면에는 애착이 다소 상실되어 있다. 

“힙하다”라고 요즘 유행하는 표현이 있다. 새로운 것을 지향하고 자신만의 개성을 추구한다는 의미라고 하는데, 아주 가끔은, 어떻게 하면 가장 빠르게, 정석으로 잘 놀 수 있는지를 세세하게 알려주는 이 시대의 세련됨을 잠시 내려놓고, 아이들이 스스로 여러 가지 갈래 길을 상상하고 선택할 수 있도록 해 주고 싶을 때가 있다. 3일 동안 끙끙대며 손수 작업한 이 나무 꼬치들은 내가 아이들에게 선물할 수 있는 일종의 레트로한, 힙한 장난감인 셈이다.

나무 꼬치에서 잘라 낸 촉들을 미술 영역에 가져다 두고, 멀리서 아이들의 놀이를 훔쳐본다. 지켜보니 한 아이가 신기한 듯 요리조리 보다가 목공풀을 종이에 바르고 나무 촉들을 뿌린다. 금방 현대미술 작품이 뚝딱 완성되었다. 한 아이는 참깨 같다고 생각했는지 가상의 요리 위에 솔솔 뿌려내어 마무리를 하고 있다. 시끌벅적한 아이들 사이에, 눈이 빠져라 집중하면서 조심 조심 나무 빌딩을 짓는 아이도 있다. 이 반 저 반, 오늘 하루도 우리 아이들이 아주 힙한 놀잇감으로 한껏 행복한 탄성을 지른다.